11월 11일 퇴임식을 가진 최재해 감사원장. 사진=연합뉴스
지난 11월 11일 최재해 감사원장이 4년의 임기를 마치고 공직 40년을 접는 자리를 가졌다. 3명의 대통령과 함께 한 특이한 경험을 해서인지 떠나면서 남긴 말이 ‘존이구동(尊異求同)이었다. 다분히 정무적인 배경을 지닌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2021년 11월 15일 문재인 정부 말기에 제25대 감사원장 자리에 올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6개월, 윤석열 정권 2년 7개월간을 거쳐 이재명 정권과 5개월을 함께 하는 등 세 명의 대통령과 함께 감사원장을 지낸 특이한 기록을 세웠다.
보통 정권이 바뀌면 새 정부가 전 정부를 뒤져 파헤치는 과정에서 검찰, 경찰, 공정위, 국세청 등이 바쁘지만 중립을 지켜야 하는 감사원 역시 아무리 독립기관이라고 해도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정권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는 것 최 원장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 정부인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관련 감사를 비롯해 부동산 관련 통계조작에 대한 감사, 그리고 전라북도 새만금 세계 잼버리 대회에 대한 부실 및 비리 감사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 원장은 퇴임식 자리에서 "존이구동(尊異求同),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다"며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때로는 의견이 부딪힐 수도 있지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차이를 존중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갈 때, 그리고 그 속에서도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떠한 난관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존이구동‘은 중국 마오쩌둥과 함께 한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가 생전에 늘 하던 말이었고, 화이부동은 논어의 한 구절이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초대 국무원총리 겸 외교부장을 지낸 국제무대에서 외교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공격적이고 거친 마오쩌둥과는 달리 친화적이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서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 어려운 외교적 문제도 합의를 이끄는 소통의 대가란 평가를 받았다.
저우언라이의 가장 큰 공이라고 하면 미중 냉전시대를 화해의 시대로 이끈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 측 상대인 헨리 키신저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얼어붙은 미중 간의 냉전시대를 대화의 시대로 이끈 장본인이다.
저우언라이의 ’존이구동‘은 이 과정에서 실제 구현이 됐다. 미국과 중국의 다른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같은 목적을 찾아 대화의 물꼬를 트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면서 화해의 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존이구동은 고정된 원칙보다는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른 잣대를 만들고 융통성을 발휘해 대화의 길을 트고 그 대화의 길을 따라 서로의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서 다분히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적인 기관으로서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감사원과는 여러 측면에서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융통성이야 어떤 업무에서도 있을 수 있지만, 감사라는 것은 다른 입장을 존중하고 같은 목적을 찾아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협의하는 과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 원장이 2021년 취임 당시의 취임사 내용을 보면 그의 생각이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감사원 직원들은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기본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며 “원칙과 기준에 따라 불편부당의 자세로 엄정히 감사를 하고 신뢰받는 감사 결과를 만들어간다면 감사원의 핵심 가치인 직무상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도 자연스럽게 확보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퇴임식에서 말한 ’존이구동‘ ’화이부동‘과는 색깔이 완전히 다른 뉘앙스다.
감사원의 핵심 가치인 직무상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 무엇보다도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기본임무에 대한 충실함이 타협과 소통으로 바뀌었다.
최 원장은 그동안 감사원장들이 모두 낙하산이었던 것과 달리 유일하게 내부에서 승진한 오리지날 감사원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취임식 때는 감사원장으로서 정권과도 거리를 두고 오로지 헌법과 법률의 틀 안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핵심가치로 뒀을 수 있다. 그러나 정권과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날이 무뎌지고 그마저도 칼집 속의 칼로서의 상징성만 남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 원장은 윤석열 정권 하에서 감사원 내에서 사실상 2인자로 밀렸었다. 윤 전 대통령 사람인 유병호 사무총장이 앞장서서 감사원을 이끌었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유 사무총장은 감사원 절차를 초월해 감사활동을 펼치고 상당수의 감사활동은 감사위원회의 의결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무총장 휘하의 특별조사국 주도로 처리했다.
최 감사원장 패싱 논란이 늘 따라다녔다.
유 총장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면서 최 원장보다는 대통령실과 소통하며 일을 진행해 무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2022년 10월에는 이관섭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과 문자 소통하는 장면이 언론에 포착돼 문제가 되기도 했다.
최 원장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존이구동‘을 실천하면서 자리를 보존하는 기술을 발휘한 것일까?
’존이구동‘을 삶의 모토로 삼은 저우언라이는 위로는 다혈질에 공격적인 마오쩌둥을, 아래로는 마오쩌둥의 정치에 불만이 많은 인민을, 옆으로는 냉전 속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미국을, 그리고 홍위병들의 철저한 견제와 감시 속에서 정치적 철학으로 다른 것을 존중하고 같은 생각을 모으는 나쁘게 말하면 비굴하고 좋게 말하면 소통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직무상 독립적이고 준 헌법기관인 감사원장이 일종의 비굴함이나 소통을 업무의 중심에 두라는 의미가 담긴 말을 후배들에게 남기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결국 요령껏 잘 살아 남으라는 얘기 아닐까?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그리고 상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 감사를 할 바에는 차라리 AI에게 감사를 맡기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공자가 제자인 자로에게 해준 견리사의(見利思義)란 말이 있다.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내놓으며, 오랜 약속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성인(君子)이 될 수 있다”란 구절의 핵심 키워드다.
감사원이 흔들리면 공무원사회가 흔들리고 기강이 무너지고 모두가 정권의 시녀가 된다. 최 원장의 송별 멘트가 매우 아쉽다.
이기영, 편집국장